안드레아 피를로는 단순한 미드필더가 아닌, 경기 전체를 조율하는 ‘딥라잉 플레이메이커’의 상징이었다. 수비 앞에서 경기를 설계하고, 공간을 읽으며 전술적 균형을 만드는 그의 플레이는 현대 축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번 글에서는 피를로의 포지션별 역할과 전술적 가치, 그리고 현대 축구에서의 계승 양상을 집중 분석한다.
공간을 디자인한 미드필더, 피를로의 기본 역할
안드레아 피를로는 경기장 위에서 움직이는 아티스트였다. 특히 그가 주로 활약했던 딥라잉 플레이메이커(Deep-lying Playmaker) 포지션은 단순한 수비형 미드필더의 개념을 넘어, 팀 전술 전체의 중심축으로 기능한다. 피를로는 수비수 바로 앞에서 공을 받아 경기를 조율하고, 패스를 통해 공격의 시동을 거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전형적인 박스 투 박스(Box-to-box) 미드필더나 단순한 볼 위너(Ball winner)와는 달리, 위치 선정과 패스 타이밍으로 경기를 지배했다. 공격과 수비의 연결고리로서, 피를로는 경기의 '템포 조절자'였다. 볼을 받은 순간부터 피를로는 단지 패스를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2~3단계의 흐름까지 예측하며 공을 분배했다. 특히 피를로의 존재는 상대 수비 전술에 영향을 줄 정도였다. 많은 팀들이 피를로에게 전방 압박을 집중시키는 ‘마킹 전술’을 펼쳤고, 이는 그만큼 그의 전술적 가치가 크다는 반증이었다. 하지만 피를로는 압박 상황에서도 공을 빼내는 탈압박 능력과 시야, 양발 패싱 능력을 바탕으로 상대 압박을 무력화시키곤 했다. 피를로의 진가는 ‘공이 없는 시간’에도 발휘되었다. 그는 수비 상황에서도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고, 상대 빌드업 경로를 차단하며 2차 전진을 대비했다. 이는 단순히 볼을 따내기보다 전술적 밸런스를 유지하는 역할이었다. 많은 수비형 미드필더가 활동량과 몸싸움으로 무장한 반면, 피를로는 지능과 움직임으로 경기를 설계했다.
롱패스와 전환 능력, 피를로가 만든 공격의 리듬
피를로의 플레이메이킹에서 가장 돋보이는 능력 중 하나는 롱패스와 전환 패스였다. 피를로는 짧은 패스를 연결하는 능력도 뛰어났지만, 상대 압박을 단숨에 무너뜨리는 롱볼 능력에서 특히 탁월했다. 그의 롱패스는 단순한 볼 배급이 아니라, ‘수비를 관통하는 공격 설계’였다. 대표적인 예는 2012 유로 대회에서의 잉글랜드전. 그는 수비수 2~3명을 넘기는 공중 패스를 통해 발로텔리와 카사노에게 결정적인 찬스를 수없이 만들어냈다. 이러한 롱패스는 마치 축구판 체스에서 한 수 앞을 내다보는 수처럼, 피를로의 넓은 시야와 전술적 이해력을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또한 그는 경기 흐름을 '끊지 않고 이어주는' 리듬 메이커 역할을 했다. 수비수에서 볼을 받아 공격수에게 연결되기까지의 전환 과정에서, 피를로는 속도 조절과 방향 전환을 통해 상대 수비의 균형을 흔들었다. 이로 인해 같은 패스도 피를로의 손을 거치면 더 위협적인 공격이 되었다. 그의 전환 능력은 단순히 패스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피를로는 항상 공을 보내는 동시에, 다음 공간을 읽고 움직일 준비를 했다. 이렇게 되면 두 번째, 세 번째 움직임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이는 공격 패턴의 유기적인 전개를 가능하게 했다. 미드필더가 단지 공을 나르는 것이 아닌, 전술 흐름을 설계하는 ‘엔진’ 역할임을 그의 플레이가 증명한 것이다.
현대 축구 속 피를로의 철학, 계승과 진화
피를로의 플레이는 단지 과거의 유산으로만 남지 않는다. 현재도 그의 전술적 철학과 플레이 스타일은 다양한 방식으로 계승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토니 크로스, 조르지뉴, 로드리, 베라티와 같은 현대의 딥라잉 플레이메이커들이다. 이들 모두 피를로처럼 전술의 균형을 유지하며 경기 흐름을 조절하고, 필요 시 롱패스를 통해 한 번에 전개를 완성시킨다. 특히 현대 축구에서는 수비형 미드필더에게 단순한 수비력뿐 아니라, 볼 배급과 전술적 판단력이 더욱 요구되고 있다. 이는 피를로가 선수 시절에 이미 실현해낸 역할이며, 현재도 그 모델이 유지되고 있다. 예를 들어 맨시티의 로드리는 피를로처럼 위치를 벗어나지 않고 경기를 통제하며, 탈압박과 중거리 패스를 통해 전환의 중심축 역할을 수행한다. 피를로의 철학은 단순한 움직임이나 패스 스킬을 넘어서, 경기를 읽는 시야와 판단력에 있다. 그래서 그가 감독이 되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가졌으며, 그 철학을 그대로 이어받은 유소년 지도자나 전술 코치들이 유럽 전역에서 활약하고 있다. 또한 피를로는 ‘패스의 정확도’보다는 ‘패스의 목적’이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단순히 공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전술적 맥락 안에서 왜 이 패스를 선택했는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철학이다. 이는 오늘날 영상 분석과 전술 트레이닝에서 반드시 강조되는 요소이며, 피를로는 그 철학의 실천자였다.